사유
내가 옳을수록 우리가 작아지는 역설
혐오의 시대는 무지의 시대가 아니다. 정보가 너무 많은 시대다. 내 입장과 같은 정보를 끝없이 공급받을 수 있는 알고리즘 안에서 우리는 점점 더 옳아진다. 옳아질수록 상대는 틀린 사람이 된다.
"내가 옳다"는 확신은 그 자체로 좋다. 그러나 그 확신이 "상대는 틀렸다"라는 결론으로 자동 연결될 때, 그것은 더 이상 확신이 아니라 폐쇄다. 우리는 자기 의견 안에 갇힌다.
혐오를 건너는 첫걸음은 의심이다. 내 확신을 의심하는 일. "혹시 내가 못 본 게 있을까"라는 한 줄의 자문. 이것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이다. 자기 의견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의견을 끝까지 지킬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갈등을 보자. 정치, 세대, 젠더, 지역. 모든 갈등에서 양쪽이 더 옳아지고 있다. 더 옳아질수록 거리는 멀어진다. 이는 산수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다. 의심의 여백이 없는 옳음은 결국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행간"이 매니페스토에 쓴 단어가 "동업자"다. 동업자는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같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이다.
한국 사회를 정의의 언어로만 풀려는 일은 절반의 답이다. 정의 다음에 동업자의 윤리가 와야 한다. 정의는 누가 옳은가를 묻고, 동업자는 누구와 함께 갈 것인가를 묻는다. 후자가 없으면 정의도 결국 갈등의 원료가 된다.
혐오의 시대를 건너는 법은 화려한 화해가 아니다. 매일 한 줄씩 자기 확신을 의심하는 작은 습관, 동의하지 않아도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자세. 그것이 동업자의 윤리다.